구글이 19년간 세 차례에 걸쳐 요청해 온 한국 고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이 마침내 조건부로 허가됐다.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소속 '측량 성과 국외 반출 협의체'는 2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국토지리정보원에서 회의를 열고, 구글이 신청한 1대 5000 축척 고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 건을 심의한 결과 조건부 허가를 의결했다고 밝혔다.

협의체에는 국토교통부를 비롯해 국방부, 국가정보원, 외교부, 통일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등 범정부 관계 부처가 참여했다.

공식 조건은 '영상 보안 처리·좌표 표시 제한·국내 서버 활용'

협의체가 이번에 제시한 조건은 세 가지다. 군사기지 등 안보시설에 대한 영상 보안 처리, 지도 내 좌표 표시 제한, 민감 정보 가공 작업의 국내 서버 한정 처리다.

주목할 점은 '좌표 삭제'가 아닌 '좌표 표시 제한'이라는 표현을 공식 조건으로 명시했다는 점이다. 두 표현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전자가 데이터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외부 노출만을 막는 방식으로 정책적·법적 의미가 다르다. 지도 가공의 국내 서버 활용 조건은 혹시 모를 보안 사고가 발생했을 때 국내에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겠다는 의도다.

이번에 반출 대상이 된 1대 5000 축척 지도는 실제 거리 50m를 지도상 1㎝로 압축 표현한 것이다. 현행 공간정보관리법상 이보다 정밀한 지도, 즉 1대 2만 5000 축척 초과 지도를 국외로 내보내려면 국토교통부 장관의 승인이 필요하다.

2007년부터 이어진 긴 줄다리기

구글 지도를 보고 있다 (출처=unsplash)

구글은 2007년과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같은 요청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가장 최근인 2025년 2월에도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협의체는 같은 해 5·8·11월 세 차례 연속으로 결정을 미뤘다. 지난해 11월에는 구글에 기술적 세부 내용을 보완한 서류 제출을 요구했고, 구글은 올해 2월 5일 이를 이행했다.

구글은 현재 SK 티맵의 1대 5000 지도 데이터를 쓰고 있지만, 데이터가 국내에 묶여 있어 일반 지도 열람 외에 세밀한 경로 안내 기능은 제공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국내 플랫폼 업계 '긴장'…지도 너머 차세대 산업까지 위협

이번 결정이 알려지면서 국내 IT 업계는 즉각 긴장 태세에 들어갔다. 직접적 파장이 예상되는 곳은 네이버와 카카오다. 국내 지도 서비스 시장은 OTT·음원 등과 달리 그나마 토종 기업이 우위를 유지해 온 몇 안 되는 영역이다. 그러나 구글이 정밀 지도를 기반으로 서비스 품질을 높이면 이 마지막 보루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업계의 우려는 단순한 지도 앱 경쟁에 머물지 않는다. 고정밀 지도는 자율주행, 드론 배송, 스마트시티, 디지털트윈 등 미래 핵심 산업을 떠받치는 기초 인프라다. 구글이 이 데이터를 확보하면 위치 기반 산업의 주도권 자체가 글로벌 빅테크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국민 세금으로 구축된 공공 데이터가 사실상 대가 없이 글로벌 기업에게 활용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지도 제작 관련 중소기업들도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구글이 시장 지배력을 확대하면 이들이 구글의 지도 API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되고, 나아가 고액의 사용료 부담까지 떠안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대한공간정보학회는 2026년 2월 학술행사에서 반출 허용 시 지도·플랫폼·모빌리티 등 연관 산업에 걸쳐 2035년까지 최대 197조 원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다른 우려는 이번 결정이 '도미노'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구글의 반출이 허용된 이상, 애플의 같은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졌다. 애플은 이미 정부에 고정밀 지도 반출을 타진한 상태다. 미국을 넘어 중국 등 다른 나라 빅테크 기업들까지 반출 요청 행렬에 가세할 경우, 이번 결정은 국내 디지털 지도 시장 전면 개방의 사실상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번 결정의 배경에는 한미 통상 협상의 흐름이 자리한다. 미국은 오랫동안 한국의 고정밀 지도 반출 규제를 대표적인 디지털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해 왔다. 안보와 통상, 산업 경쟁력이 뒤엉킨 이 사안에서 정부가 결국 조건부 허용 쪽으로 방향을 튼 셈으로 보인다.